뚜르르르릉, 뚜르르르릉. 규칙적으로 머리를 아프게 울리는 전자음에 감긴 눈으로 힘겹게 자명종을 꽝! 내리쳤다. 그러나 소리를 없애기 위해 했던 행동과는 위배되게 자명종이 가차없이 삐륵삐륵삐륵, 삐륵삐륵삐륵! 하고 괴소리를 내며 울어대기 시작한다. 씨발. 잘못눌렀다. 이건 자명종 소리가 아니라 전화기 소리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울어대는 자명종의 건전지를 한손으로 빼버리고 시끄럽게 뚜르릉대는 전화를 들었다. 발신자 번호도 확인하지 못한체 바삐 받은 전화 건너에선 생판 처음듣는 생경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잔뜩 잠긴 내 목소리에 상대가 조금 당황한듯 하다. 그러나 인텔리적인 느낌을 팍팍 풍기는 딱딱한 남자의 말투에 전화상임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의 카리스마에 조금 주눅이 들 정도였다. ― 민강유씨 전화 아닙니까? "아닌데요." 또렷하게 들리는 남자의 질문과는 달리 잔뜩 잠긴 목소리 때문에 약간 뭉개진듯한 내 대답은 어제의 밤샘으로 인해 피곤해진 몸의 상태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내가 듣기에도 심하게 웅얼거린 내 대답을 상대는 못 알아들었는지 말없이 수화기를 든체로 가만히 있는다. 씨발, 어제 밤 샜다고 이십쌔야. 아닌줄 알았으면 얼른 끊어야 할 거 아니야. 짜증이 확 피어올라 싸가지 없이 한마디 날려버렸다. 뭐, 다시 볼 사이도 아니고 끊어버리면 그만이잖아? "아니라고 이십쌔야." 쯧, 혀를 차며 폴더를 닫아 버렸다. 아침부터 재수가 없으려니까 잘못 걸린 전화나 오고 말이야. 칼칼한 목을 축이기 위해 방문을 열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데 전화가 뚜르르르릉! 다시 걸려온다. 신경질적으로 울리는 전화기에 화들짝 심장이 쿵, 내려앉는것 같다. 죄를 지어서 그런가. 번호를 확인하니 모르는 번호다. 이번엔 뭔가 싶어서 인상을 그리며 전화를 들었다. "여보세요." ― 너 뭐라고 했어. 전화기를 들기가 무섭게 대뜸 상대편에서 악의적인 질문이 날아온다. 씨발, 아까 그새끼다. 짜증이 화르륵― 불타 오르듯 피어난다. 짜증나는 감정 한켠에선 어쩐지 웃기기도 하다. 이 낮고 예의바른 목소리를 가진 남자가 쪼잔스럽게도 잘못걸린 전화를 했다는 이유로 욕을 먹자 보복 차원에서 다시 전화를 걸다니 블랙코미디가 아닌가. "[아니라고 이십쌔야]라고 했는데." 아까와 같이 짜증이 잔뜩 난 목소리로 한번 리바이벌 해주고 다정하게 응수까지 붙여주자 단지 전화통화 중인데도 불구하고 남자의 화나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듯 하다. 그것참 폼 오지게 잡는 놈일세. 그사이 방을 빠져나와 정수기 앞에서 물을 [또르륵] 받았다. [꿀꺽꿀꺽] 시원한 물을 한잔 들이키고 컵을 내려뒀다. 그 긴 시간 사이에도 남자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없이' 또 한 번 무례를 범하기로 했다. 어차피 얼굴 볼 사이도 아닌데 뭐 어떤가, 성질대로 하는거지. "할 말 없으면 끊는다." 그렇게 한마디 남기고 [뚝] 전화를 끊어버렸다. 큭큭큭 성질꽤나 나겠지. 이상하리 만큼 즐거움이 소록소록 피어오르는데 화들짝 또 한번 전화가 [뚜르르릉, 뚜르르릉] 하고 울린다. 헤, 이거 의외로 꽤 질기잖아. "여보세요" ― 야 두번째 통화가 악의적이였다면 세번재 통화쯤에서 남자는 조금 열이 받아있었다. 받자마자 '야'라니 어디서 배워먹은 뽄세인지. 전화 예절이 엉망이로군. 뭐, 나도 나무랄 입장은 아니지만서도. 쿡쿡. 사실 안받으면 그만이지만 난 남자의 전화를 줄기차게 받고 있었다. 어차피 할짓없는 한가한 백수인생 뭐 특별히 할일도 없고 열받은이 좀더 열 올리며 놀아보자는 고약한 심보다. "왜." ― 너 잘못 걸린 전화를 늘 그런식으로 받아? 어쭈? 니 전화예절은 뭐 그렇게 예의바른 줄 아냐? 아예 가르치려고 드는군. 누가 누구를 가르치려는건지 코웃음을 치며 상대의 심기를 건드려 보기로 했다. "등신새끼처럼 못 알아들으니까 그러는거 아냐." 깊게 잠겨서 거칠게 갈라진 소리를 냈던 목이 물한잔에 어느정도 회복이 되자 그저 짜증이나서 말했던 아까완 달리 친구를 약 올리듯 느글느글 능글능글 아주 물 만난 고기마냥 즐거운 목소리가 되었다. 등신새끼 나왔다. 이제 저새끼도 열 좀 받았겠지. ― 넌 전화 잘못 걸때 없어? "없어, 손가락 빙신도 아닌데 내가 왜 전화를 잘못걸어?" 열이 바싹 오른 남자에게 빈정대듯 한마디 툭 내뱉고 큭큭 능청맞은 웃음을 덧붙였다. 단단히 화가 난듯 살이 에일것 같은 냉한 한기가 전화 넘어에서 전해온다. 흐음, 여자였다면 분명히 다정하고 다소곳하게 받았을 정도로 남자답고 좋은 목소리를 가졌지만 난 너랑 같은거 달린 남자걸랑. [똥 밟았다] 생각하고 이만 여기서 끝는게 어때? "할 말 없으면 끊는다." 더이상 들을 말도 없을것 같고 전화 잘못 건 죄밖에 없는 놈을 등신새끼에 손가락 빙신까지 만들었으니 이정도면 충분하다 싶어서 한마디 남기고 뚝- 전화를 끊어 버렸다. 또 걸진 않겠지 하는 생각에 아침이나 먹을 요량으로 냉장고를 [벌컥] 여는데 식탁 위에 올려뒀던 전화가 [뚜르르릉, 뚜르르릉] 지치지도 않고 울린다. 그리고 머리에 떠오른 한가지 생각. '내가 잘못 건드린거 아닐까…….' 징크스 ― 코박의 수수께끼 "전화번호를 잘못 눌렀을 때 통화중인 경우는 없다" 뚜르르릉, 뚜르르릉. 마치 영화 폰의 마지막 장면에 사람 화들짝 놀라도록 방정맞게 울리는 전화처럼 내 전화가 이른 아침부터 또 울려대기 시작했다. 씨발, 이 개쉑 오늘은 아주 아작을 내버리겠어. 가시가 콱콱 박힌 말들을 내뱉은 나에 대한 보복으로 잘못걸린 전화를 한 남자는 그날부터 꼬박 일주일을 아침 5시가 되면 칼같이 전화를 한다. 모닝콜이다. 이건 그냥 모닝콜이야. "뭐야." ― 일어났나 보네. 일어났지 그럼 이 십쌔야. 정말 전화기 꺼버리고 자버리고 싶지만 집에서 놀고 먹는 백수 신세라 구직신청 해둔곳에서 혹여 전화가 올까 싶어서 전화도 못끄는 불우한 나는 이른 아침부터 내게 열받은 남자의 심심풀이 상대가 되어 주어야 했다. 일주일 정도면 화가 풀렸음직도 싶은데 꽁하기 짝이 없는 이 놈은 도대체 나랑 무슨 원수가 졌는지 매일매일 출근도장 찍듯 전화질이다. "잘거야, 끊어." ― 요즘 아침형 인간이 유행이라는데 일찍 좀 일어나지. 아, 이 개씨발 같은 놈이. 멀끔하게 들렸던 남자의 목소리와는 사뭇 다르게 남을 괴롭히기 위해 아침 댓바람 부터 전화질 하는 녀석은 장난스런 성격도 꽤 있는 모양인지 곧잘 나의 염장을 지르는 소리를 하곤한다. 아, 대가리 울려. 빨리빨리 지껄이고 이만 끊자. "유행을 안타." ― 백수는 아니고? 개쉑, 그래 나 백수다. 미운말을 콕콕 집어내서 하는 점잖은 목소리의 놈에게 나는 이를 으득 갈아줄 뿐이다. 후우, 내가 바라는것은 [짧은 통화]이고, 녀석이 바라는것은 [염장 지르는 통화]다. 물론 내가 그 염장을 그냥 가만히 받고있는 착한놈은 아니다. 덕분에 통화는 더욱 길어지고 녀석이 지칠줄 모르고 매일 전화질이라는 것을 알고있다. "그만하지." ― 뭘? 다 알면서 일부러 모르는척 짐짓 아는게 없는척 가증도 이정도면 왕내숭인거다. 에라 모르겠다 싶은 마음에 배터리를 팍- 빼버렸다. 썅, 될대로 되라지. 난 잠이나 잘거야. 풀썩, 침대 위에 늘어지는 몸을 던지듯 누이고 긴 잠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이놈아, 안 일어나!!!" "아으, 어머니!" 내 궁둥짝을 사정없이 [철썩철썩] 내려치시는 여인은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아줌마이시다. 그새끼가 괴롭히지 않으니 이번엔 어머니시유? 인상을 있는대로 그리고 자리에 앉자 머리위로 잔소리가 우두두둑 떨어진다. 아아, 나가고 말지. 알았어, 알았다고 나가면 될거 아니야! 짜증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잔소리를 피해 도망치듯 집을 빠져나왔다. 오랜만에 친구나 만나야겠다 싶어 타박타박 길을 걷고 있는데 앞에 말끔하게 정장을 입은 남자의 뒤통수가 보인다. 어, 옷 좋은데- 속으로 야유 한번 퍼부어주고 인생 참 비교된다 싶어 괜히 심통이나 혼자서 삐죽거렸다. 터덜터덜 길을 걸으며 아침에 오는 반갑지 않은 모닝콜 때문에 빼놨던 전화기 배터리를 꼽으며 길을 가는데 앞에 사람 발에 밟혀 납닥해진 깡통이 보였다. 길바닥에 짓밟힌체 나뒹구는 모습이 영락없이 나와 닮아 있어 동질감에 한번 차주기로 했다. 그리고 생각이 들기 무섭게 꼬일대로 꼬인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듯 [뻥-]하고 깡통을 오른발로 강하게 찼다. 뚜르르릉, 뚜르르릉. 깔끔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깡통이 점점 아래로 떨어지며 앞에 가는 정장 남자의 뒷꼭지에 가까워 지고 있을 무렵 방금 전원이 눌러진 전화가 방정스럽게 울렸다. 씨발.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기어오르더니 기어코야 일이 터지고 말았다. 퍽. "헉!" 아름다운 소리를 내며 남자의 깨끗한 정장 마이에 [쨍깡] 소리를 내며 안착해버린 깡통이 보였다. 가슴이 달달 떨려왔다. 재수가 더럽게 없구나. 심장이 두근반 세근반 하고 있는데 자꾸만 울리는 전화에 면이 더욱 팔려 후다닥 전화기를 들었다. 내가 찬 깡통에 맞은 남자는 옷을 툭툭 털며 번쩍이는 눈으로 좌우를 살펴보고 있었다. "여보세요." ― 야. 이게 뻐뜩하면 야라네. 안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왜 사람 귀찮게 전화질이야? 난처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뒤로 뒷걸음질을 치는데 순간 정면으로 눈이 마주쳐버렸다. 내앞에 약 5미터 전방에 있던 신사복을 잘 차려입은 남자가 나를 보며 전화를 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똑똑히 보였다. ― 너. "어?" 신사복 남자의 '너'라는 입모양이 똑똑히 보였다. 씨발, 이놈이 그놈이고 그놈이 이놈이야!?!! 머리에 불이 번쩍 피어올랐다. 폴더를 닫아버리고 미친듯이 뛰기 시작했다. 달려야해! 아악!! 이런 말도 안되는 개같은 상황이라니!!!!! 정신없이 뛰고 또 뛰는데 뒤에서 건장한 사내가 구둣발 소리를 내며 나를 쫓아온다. 아아, 씨발 아니나 다를까 역시 쫓아오는 이는 모닝콜이다. "너 거기안서!" 너라며 서겠냐? 목청도 좋지 십쌔. 쪽팔림이 극에 달할수록 나의 한계치를 높여주듯 뒤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치며 뛰어오는 모닝콜을 피해 정신없이 뛰어 지하철로 마구마구 달려갔다. 그리고 [쿠당탕탕탕] 거의 미끄러지듯 계단을 내려와 [탁탁탁탁] 발을 굴려 거의 닫힐뻔한 지하철로 쎄이프-!!! [쾅!] 내가 지하철에 오르자 마자 문이 닫혔고 좆빠지게 나를 쫓아 달려온 놈은 속절없이 닫히는 문이 야속한지 애꿎은 지하철 창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크하하하하. 살았다. 헥헥. 승리의 기쁨에 도취된 나는 거칠게 앞머리를 쓸어올리는 의외로 엄청나게 수려한 외모를 지닌 잘생긴 모닝콜을 보며 싱긋 웃었다. 그리고 너무 기쁜 나머지 흥분하여 불손하기 짝이없는 가운데 손가락 스윽 들어 보여줬다. 열이 바싹 아주 바싹 오른 그는 투명한 문 하나 넘어에 있었으나 냉기가 뚝뚝 흐르는 살벌한 눈빛을 보내온다. 그러나 지가 지하철을 뚫고 들어오겠나 어쩌겠나 운수대통 했구나 기뻐라 하며 한쪽 자리에 풀썩 주저 앉았다. 기긱기긱기긱. 지하철 내에 설치된 스피커에 뭔가 불길한 기운이 가득 느껴지는 기긱거리는 기계 소리가 들렸다. "잠시…에흠에흠…배차 시간을 맞추기 위해 '정차'하겠사오니 ……배차 시간을 맞추기 위해 '정차'하겠사오니……." 스피커에서 난대없는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차'란 말 이후로 내귀에 그 어떤 단어도 들어오지 않았다. 스르릉, 열리는 문소리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허겁지겁 앞칸으로 전진하고 또 전진했다. 뒤에서 어둠의 오라를 뿌리며 암흑과도 같은 짙은 공포가 나를 바싹 쫓아왔다. 목덜미 위로 차가운 손길이 느껴지더니 거칠게 날 뒤로 잡아끈다. "윽." "너 오늘 죽었어." 오늘은 2월 13일 요일은 금요일이었다. 징크스 ― 13일의 금요일 "불길한 날" 쾅. 윽! 지하철에서 내린 녀석은 나를 단단히 잡고 으슥한 골목으로 질질 끌고 왔다. 결코 작은 키가 아닌 나보다도 무려 머리통 하나가 더큰 녀석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있는대로 힘자랑을 하며 여유있게 나를 구석진 벽으로 던져버린다. 아아… 잘못 걸렸군. "야." "왜." 바닥에 내동댕이 쳐졌지만 기죽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난 놈에게 중간 손가락도 날렸고, 도주에 성공도 했었고, 오는 전화로 약도 바싹바싹 올렸었고 해볼건 다 해봤다. 뭐 한번쯤 당하는것도 나쁘지 않겠지 싶은 마음에 여유있는척 허세를 부리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한편으론 무릎 꿇고 한번만 봐달라고 빌까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워낙 인상이 강한 모닝콜을 상대로 그런 부탁말씀은 도저히 먹힐것 같지가 않았다. 저 남자다운 얼굴이 내겐 모닝콜로 불리다니 너도 인생 참 엿같다. "맞을래, 사과할래?" "때려." 이참에 맞을 만큼 맞고 보상이나 두둑하게 받아보자는 심보에서 고개를 비스듬히 틀어서 얼굴을 내밀었다. 이래뵈도 보험든게 한두개가 아니다. 말년을 위해 나도 꽤 노력하고 살았던 놈이다 이거다. 패봐! 패봐! 치라고 얼굴을 내밀자 기가 막힌지 잘생긴 이마를 찌푸리며 '하아…' 하고 긴 한숨을 내쉰다. 뭘 고민하고 그래. 옷도 비싼거 입었구만 돈 좀 있겠는데 이참에 불우 이웃에게 기부나 듬뿍해라. "꺼져." "뭐?" "꺼지라고!" 참 신기한 놈이다. 가라는데 뭐 가기야 하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놈인거다. 여지껏 아침마다 전화 하면서 이녀석 내게 욕한적이 한번도 없다. 등신이니 빙신이니 소리 듣고도 사람 염장 지르는 소리만 할뿐 결코 상스러운 말을 내뱉지 않는다. 의외로 여성스러운걸지도 모르지. 후훗. 속으로 되지도 않는 상상을 하며 몸에 엉겨붙은 먼지를 '탈탈' 털어내며 탁탁탁, 계단을 힘차게 올랐다. 오랜만에 나온김에 아는놈들이나 만나야겠다. "푸하하하하핫, 큭큭큭큭." 나를 심히 노려보는 눈길이 곱지못한 후배의 면상이 보였지만 난 통쾌하게 웃어줬다. 한겨울, 팬티 하나면 만사오케이인 수영장의 꽉 막힌 내부에 [좡좡좡] 울려대는 내 목소리는 꽤 즐거웠다.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고 앞이 답답할지언정 난 눈앞에 놓인 즐거운 모습에 박장대소를 하고 있었다. [첨벙첨벙], [덤벙덤벙], 그리고 핵심단어인 [허벅허벅]을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분홍 수영복에 분홍 캡을 쓴 살점이 토실토실 오른 아주머니는 수영 초보인 모양이었다. 팔을 제대로 휘두른다 싶으면 다리가 [아래로, 아래로] 하강하고, 다리가 좀 잘 텀벙인다 싶으면 상체가 [아둥바둥] [꼬륵꼬륵] 물속으로 잠수 해대는 꼴이 영락없는 돼지 물장구 치는 수준이다. 푸하하하하. 아, 물론 화통하게 웃는 나를 보며 그녀도, 그녀를 가르치고 있는 나의 후배도 표정이 사뭇 비장했다. 사실 비장보다는 띠거웠다. 큭큭큭. "선배!" 보다 못한 경주가 내게 투닥이며 뛰어온다. 가르치던 분홍 수영복, 분홍 캡 아줌마는 나의 웃음으로 의욕을 상실한 표정으로 한쪽에 앉아계신다. 어쩐지 조금 찔리기도 했지만 뭐랄까 못하는 사람을 보면서 다같이 즐기는 문화가 오늘따라 구미에 당긴다. 거기다 잘난척해대던 우경주의 첫번째 레슨을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난 심각하게 즐거워 하고 있었다. "태수는?" "시끄러워요. 일어나세요." 2년 후배인 경주는 얼굴까지 시뻘개져서는 코치들만이 들어갈수 있는 특수공간으로 나를 밀어넣는다. 새끼, 힘도 좋지. 속으로 어여쁘게 욕해주고 있는데 놈은 나를 감금 시켜두고 발을 쿵쿵쿵 굴리며 가버린다. 감금자의 도리로 우경주의 뒷꼭지를 매섭게 노려봤다. 오늘 여기에 온건 오랜만에 사람 만날 요량인것도 있지만 현역 수영선수를 그만둔 이들이 무엇을 하는지, 어떤 생활을 하는지, 얼마나 사회에서 제몫을 하는지 구경하려고 왔는데 본의 아니게 꽤 재미난걸 봐버렸다. 국내에서 발군의 실력을 가졌다고 할법한 녀석들만 모여있던 대표팀 연습에서는 결코 볼수 없는 수영초보의 허덕거림은 정말 신선 그 자체였다. 크하하하, 아줌마 발을 굴리면서 팔을 돌려야지! 저 아줌씨는 멀티플레이도 못 들어봤나? 정말 더럽게 못하네. 답답하고 재미난 마음이 난제된 심경으로 코치실 문을 밀고 다시 수영장으로 나가자 [꽥!] 우경주가 소리를 친다. 씹새, 니 만나러 온거 아니라니깐. "왜 나와요!" "태수는?" 볼만한건 다 본것 같지만 그래도 친구이자 동기이자 나름대로 라이벌이었던 이를 만나는게 가장 좋을것 같았다. 뭐랄까, 가장 동질감을 느낄수 있을것 같은 상대랄까. 그렇게 멀뚱멀뚱 강태수를 찾고 있는데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 하나하나에 존재감이 실린 듯한 느낌이 드는 사람이 내 앞을 스윽― 지나갔다. 마치, 그 사람 주위만 시간이 멈춘것 처럼 천천히 슬로우 모션으로 각진 근육을 가진 남자의 움직임이 눈에 또렷히 맺힌다. 오, 몸 좋은데. "태수선배 감기로 병원갔어요." "학생들은?" "자유수영이요." "흐응―." 김샜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이거야 원 임마, 그럼 빨리빨리 이실직고 해야할것 아냐! 괜히 엄한 아줌마만 놀리는 꼴 됐네. 큭큭큭, 그래도 되게 재밌었지. 몸을 쭈욱 쭈욱 늘리고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꽤 큰규모의 회사가 후원하는 백화점에 딸려있는 수영장은 언뜻 보기에도 잘 지어진데다 시설도 최고급이었다. 뭐, 학생은 그닥 훌륭한것 같지 않지만 원래 수영이란게 하면 할수록 느는거니깐 문제될 것 없을듯 싶다. "응?" 내앞을 지나갔던 꽤 괜찮은 몸매의 남자는 가볍게 스트레칭을 마치고 [첨벙] 물속으로 입수한다. 스포츠용 수영장으로는 드물게 50m풀인 이곳에는 재밌게도 출발대까지 갖춰져 있었다. 꼴에 별게 다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재미난걸 사용할 정도로 훌륭한 실력을 가진 사람이 오기는 오는 모양이였다. [촤아아아악] 물방울을 튕기며, 스윽, 스윽 앞으로 여유롭게 쾌속 질주를 하는 남자의 큼직큼직한 스트로크와 힘있는 파워킥은 근자에 본적이 없는 와일드한 맛이 담뿍 담긴 깔끔하면서도 거침없어 보이는 시원한 프리스타일이였다. "잘하죠?" "그러네." "우리 회사 실장이에요. 일도 끝내주고 머리도 좋고 해외파인데다가 뭐, 아버지 잘 둬서 군대 안가고 바로 여기서 일하죠." 경주는 수업을 마쳤는지 학생 아줌마들에게 간소하게 인사를 마치고 풀 사이드로 올라와 내옆에 서서 자신의 회사 실장이라는 남자를 콕콕 찌르며 약간 가시가 밴듯한 칭찬을 하고 있다. 으음, 확실히 폼이 멋지긴하네. 경주랑 나란히 서서 남자를 구경하고 있는데 모두들 같은 시간에 마치는 건지 나머지 녀석들도 우루루 떼지어 옆으로 와 실장이란 남자에 대해 한마디씩 늘어놓는다. 쨍알쨍알 좀 시끄럽군. "전에 테니스 클럽에서도 봤는데 폼 죽이던데요" "난 스쿼시 하는것도 봤는데, 층층이 있는 스포츠 센터 스포츠를 다 할줄 아나봐?" "그런가 보다. 그러고보니 골프장에서도 본것 같다." "자기가 해병대 간다고 했는데 회사일이 급하니까 그냥 회장이 오라고 했다나봐요." "나이는 겨우 우리랑 동갑인데 직급이 다르죠! 직급이! 크윽." "동갑이라고?" 나의 의아한 물음에 경주가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나보다 어리단 말이잖아? 하! 그것참 어린게 신통방통하네. 재밌다는 생각을 하며 우루루 떼지어 코치실로 들어가는 녀석들을 따라서 들어갔다. 간이 의자에 앉아 동분서주 다음에 올 학생들 명단을 빼어드는 후배녀석들을 구경하며 여유롭게 웃었다. 나도 그냥 수영강사나 할까. 보기보다 재밌어 보이는데. 긁적긁적 머리를 긁적이며 앞으로의 일을 곱씹어 생각했다. 무작정, 정말 무작정이지 대표팀을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더이상 할 기력이 나질않아 도저히 못하겠다고 손사례를 치고 나오는 내 뒷머리에 대고 코치는 "싸가지 없는 놈"이라고 고맙게도 욕을 해줬다. 덕분에 죄책감 없이 대표팀을 무난히 탈출해 집으로 왔는데 집안꼴이 말이 아니었다. 보통 생각하기엔 빤쮸 한장만 있으면 될것 같은 수영선수들은 돈이 들지 않는 스포츠 같지만 의외로 수영을 하는데 만만치 않은 돈이 든다. 빠듯한 살림이라고 해도 이제는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우중충해진 집안 분위기에 하루아침에 백수된 아들까지 보태지자 그 암울한 기운은 이루 말할수 없을 정도로 극악이였다. 계획없이 움직인것이 큰 손해를 불러 일으킨것 같기도 했지만 더 이상 그곳에서 버틸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난 새로운것을 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던것 주위에서 어물쩡 거리고 있지만……. [끼이익.] 유리문을 밀고 들어오는 사람 기척소리에 수업을 하러 나간 녀석 중 뭔가 두고 나간게 있나 해서 고개를 들었는데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던 얼굴이 나를 내려다 보고 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장본인은 아까 나를 무참히 바닥에다 메다꽂은 모닝콜이었다. 이새끼 이거 아까 그냥 가라고 한거 내가 여기 오는거 알고 가라고 한건 아니겠지? 머리가 지끈거리다. 아이고, 두야. 징크스 ― 겁퍼슨의 법칙 "일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일일수록 잘 일어난다." 단단하게 짜여진 복근과 몸에 보기 좋게 형성된 각진 근육과 늘씬하게 뻗은 다리는 운동선수 만큼이나 탄력있는 허벅지를 갖고 있었다. 모두 빛을 흡수 할것 같은 짙은 검은 머리는 목탄의 건조한듯 메마른 흑빛과 닮아 보였다. 거기다 머리칼 만큼이나 짙은 검은 눈에 싸늘한기운을 가득 담은 녀석은 무척 삭막해 보였다. 인상이 남자다워 보이는건 저 지독하게 까만 머리칼과 빨아들이는듯한 잿빛눈 때문인것 같다. 그나저나 다신 만나기 싫었는데 이렇게 돌아서자 또 보게되다니 한마디로 좆됐다. "관계자 외에는 출입금지……." 당당하게 내 앞자리를 앉는 녀석에게 뭔가 말을 하다 어물렁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놈이 아까 그 실장이란 놈이다. 실수했군. 그것도 엄청 실수했군. 한두번도 아니고 몇번이나 실수를 했다. 나한테 잘못 전화건것도 이놈이고, 내가 찬 캔에 맞은것도 이놈이고, 경주네 실장도 이놈이고, 꼬여도 단단히 꼬였다. 진짜 좆됐네. "여기 선생님?" 신경질적인 느낌이 드는 날이선 목소리로 경주네 실장이 물어온다. 존칭이 성립됐으니 이왕이면 공식적인걸로 부르자. 모닝콜은 아무리봐도 이 녀석의 애칭으로 하기엔 심하게 무리가 있다. 이렇게 점잖게 생긴 주제에 아침마다 내 전화기에 히스테리를 부리다니 한달에 한번 걸린다는 마법에라도 걸린건가? "그 선생들 선배." 이제껏 살아오면서 나보다 나이 어린 놈에게 존대를 해본적이 거의 없다. 설령 있더라도 상대가 나보다 많다고 생각했을때 한것이지 나보다 어린걸 뻔연히 아는데 존대를 해준적은 없다. 더군다나 어차피 놈과 나는 여지껏 말까고 대했었다. 또, 이녀석이 나보다 어린걸 뻔히 아는데 당당히 반말을 해오니 다소 삐딱선을 탄 대답이 흘러 나왔다. "경주네 선배?" 경주랑 아는 사인가보다. 나한테 열받은거 경주놈한테 푸는 그런일은 안 일어날것 같다. 내가 녀석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끄덕] 끄덕이자 그도 함께 '그렇군' 이라며 따라서 끄덕인다. 바깥에서 한참 수업중인 후배들이 학생들에게 [꽥꽥] 질러대는 소리가 코치실 유리문을 넘어 들려왔다. "경주친구?" 문법적 구성에서 반쯤 어디다 갖다 버린 나의 질문에 녀석이 꽤 대답하기 싫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경주 친구군, 경주 선배다. 존대해." 짤막하게 녀석에게 명령을 내리자 어이가 없는지 인상을 팍 쓴다. 지한테 별별 소리 다한 실없는 놈이 지친구 선배라는 이유로 존대하라고 하니 '그러겠습니다' 라고 곱게 수긍은 못하겠지. 하긴 나라도 이럴 경우에라면 친구 선배고 뭐고 안봐주고 패버렸을거다. 그러게, 아까 패라니깐 안팬 니죄다. "수영선수…?" 존대해라고 했지만 녀석이 존대할거라고 기대도 안한다. 그리고 저정도면 양호한 질문의 형태지. "이새꺄 너도 수영하냐?" 뭐 이렇게 안 묻는것만해도 다행이 아닐까. "이젠 선수 아닌데." 관심인지 단지 할말이 없어서 한번 해보는 말인지 의도를 알수 없는 질문이지만 질문한 성의가 있으니 대답을 해줬다. 뭐, 예쁘게 흘러나간 대답은 아니다. 이미 선수를 그만둔터라 조금 부룽퉁하기 까지 한것 같다. 나의 대답에 녀석의 표정이 조금 의아하게 변한다. 너 나 아냐? "선수 그만두셨어요?" "……응." "지금은 뭐하세요?" "알면서 뭘 물어? 백수냐고 니가 물었잖아? 나 백수맞아." 당황스럽게도 꼬박고박 존댓말로 질문을 하는 녀석의 모습에 순간 '어질' 했지만 가차없이 대답을 해줬다. 조금 비꼬은것 같기도 하다. 얘가 갑자기 미쳤나, 왜 깍뜻한 존대래. 깔끔하게 떨어지는 내 대답에 녀석의 의아했던 표정이 어이없음으로 변한다. 물론 그 어이없음의 표정은 나의 삐딱선을 탈대로 탄 마지막 대답으로 조금 미안한 얼굴로 변한다. "그냥 쉬시는 건가요?" "아니, 일자리 찾아봐야지." 물방울을 뚝뚝 흘리던 녀석의 머리칼이 조금 마르자 검은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이상하네. 보통 옅은 빛으로 변할텐데. 눈을 가늘게 뜬체 녀석을 관찰하고 있는데 갑자기 생각도 못한 제의를 한다. "여기서 선생님 하실 생각 없으세요?" 선생님이라 …수영 선생님? 나 여기 선생 시키고 네밑에 두고 부려먹게? "없어." 덤덤하게 묻는 그의 질문에 담백하게 대답하자 '어째서?'란 표정으로 변한다. 그래서 손바닥을 쫙 펼쳐서 눈앞에 내보였다. 붉은 피가 잔뜩 고여있는 손끝이 화상을 입은듯 새빨갛게 열이 올라있는데다, 드문드문 피딱지까지 맺혀있다. 쩍쩍 갈라진 손끝에 메마른 하얀색과 그걸 더욱 돋보이게 하는 짙은 핏빛의 붉은색을 본 녀석의 인상이 찌푸려진다. 내가 봐도 징그러운데 남인 그가 보면 더 끔찍한테지. 넌 어차피 나한테 안좋은 감정도 많으니 이거 보고 더 정떨어져라. 오른손도 왼손도 모두 피부 트러블로 잔뜩 부어 오르고 열이 올라 보기에도 흉하다. 흉하기만 한게 아니라 더이상 수영을 하기 싫어질 정도로 쓰리고 아프다. 손만 그러면 그래도 참겠지만, 발바닥도 살갗이 모두 벗겨져 벌겋게 열이 올라있다. 한발 내딪을때 마다 거북이 등껍질 처럼 쩌적쩌적 갈라지면서 피까지 맺히니 살아가기 싫을 정도의 고통에 난 두손두발 다 들었다. 수영장 물이 독해서인지 아니면 피부가 까탈스러워서인지 이 지독한 피부병은 수영을 시작한 이래로 날 떠난적이 없다. 수영을 그만둔 결정적인 사유는 '더이상 의미가 없어서' 이기도 하고 '새로운것을 찾기위해' 이기도 하지만 원천적으로는 '피부병이 너무 괴로워서'인것이 아닐까하는 의심이 들정도로 요즘 이 피부병이 더욱 싫다. 아픈것은 둘째치고 보는이로 하여금 혐오감을 일으키게 한다. 아픈것 또한 움직일때 마다 피부가 과자 부스러기 처럼 떨어져 내리니 움직이는 것 조차 귀찮고 두려울 정도이다. "아프겠네요." "발바닥은 이것보다 더 심해." 흑인에게는 피부병이 없다는게 일반적인 정설이다. 아닌게 아니라 백인이나 황인종에게만 유독 이 피부병이 지나친감이 들정도로 잘 나타난다. 수영선수 중에 피부병 약 한두개 안갖고 있는 사람이 없고, 피부과가 집과 같을 정도로 친근한 이도 있다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껏이다. 손발에 껍질 다 벗겨지고 피부에 마른 버즘까지 생기자 수영장 물만 봐도 구역질이 날 정도가 된 지금 내게 수영장으로 가라는 말은 나를 두번 죽이는 일인것이다. "발도 그래요?" "몸도 갈라져." 슬쩍 티를 들어올리며 대답하자, 놈이 깊게 인상을 쓴다. 완전 찌푸려졌음에도 수려한 외모라 그런지 별로 짜증스럽지가 않다. 복 받은 놈이로군. 뭐랄까 녀석은 내 몸상태가 정상과 조금 멀다는걸 알자 더욱 미안한 표정이 된다. 아마 아까 바닥에다 패대기 친게 걸리는 모양인데 수영 그만둔지 며칠 된터라 보이는게 여전히 끔찍스럽긴 하지만 예전의 고통에 비해 이건 새발의 피이기 때문에 사실 그다지 미안해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럼 카운터에서 일반사무라도 해볼래요?" "일반사무?" "정규직이 부담스러우시면 파트타임이라도 …생각 없어요?" "나야 하고 싶지만."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가는 사이 난 '구직'을 절대필요로 한다고 말했고 그는 권력자로써 '도움'을 줄수 있는 말을 했다. 카운터 알바라 나쁘지 않다. 선생들처럼 주말에도 나와서 수영장 안전관리 하는것도 아니고 그냥 일주일 중에 5일 나와서 카운터에 앉아 있으면서 손님이나 받으면 그만이다. 거기다 청소하는 아주머니도 따로 계시고, 백화점에 부속돼 있는 스포츠 센터라서 여직원도 다 젊고 이쁘다. 한마디로 근무 환경 굳!! 뭐, 녀석이 나를 채용하려는 의도를 알수 없다는게 좀 걸린다. "그럼 내일부터 나올래요?" "좋아." "다른건 카운터 직원한테 들으시면 될것 같고……." "그래." 너무 쉽게 취업이 되자 뭔가 얼떨떨한 내가 의외로 그렇게 나쁜놈만은 아닐지도라고 생각하며 쉬엄쉬엄 대답을 하자 녀석이 잠시 고민하는듯 하더니 숨겨뒀던 의도를 그제서야 끄집어 낸다. 뭘 원하냐? 역시, 뭔가 있어. "음… 임시직이시니 간부인 저에게 일하는 동안만은 존대를 해줬으면 하는데……요." "존대?" "네." "내가 존대하면 너는?" "알바한테 존대해주는 실장은 없죠." "말 깐다고?" "네." 씨발.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분명히 내 머리는 놈을 향해 걸출하게 욕을 내뱉었다. 어린놈에게 내가 존대를 해야한다고? 단지 정규직이 아닌 임시로 하는 알바이기 때문에? 아니면 내가 녀석을 지독스럽게 열받게 했었던 과거의 전적 때문에? 끄응, 잠시 고민하는척 해보지만 '일하는 동안만'이라니 내게 선택권 따윈 처음부터 없었던 조건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미 녀석에게 반말은 지겨울 만큼 들어봤다. 내쪽에서 존대를 해야한다는 것은 좀 많이 씨발스럽지만 입에 풀칠할 순 없으니 빌어먹을 일이지만 난 천천히 아주 느릿느릿 삐걱삐걱하고 소리가 날 정도로 불만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짜증으로 가득한 나의 불만스럽기 짝이 없는 대답에 녀석의 얼굴이 한순간 씨익 하고 미소를 그린다. 아주 시원하고 통쾌해 보이는게 뭔가 속은것 같은, 심하게 손해보는 장사를 한것 같은 느낌이 팍팍 들었지만 이미 약속을 해버린 뒤였다. 악마의 미소도 저것보다 덜 악독할것 같다. 징크스 ― 마인스 하트법칙 "타인의 행동이 평가 대상이 되었을 때, 마음속으로 좋은 인상을 심어주면 꼭 실수를 한다" "안녕." 그래, 이제 대놓고 아예 반말을 해라. 휘유. 수영장 카운터 지기 삼일째, 수영장 앞에서 보초 서는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더욱이 내 눈앞에 잘난 면상과는 어울리지 않게 사악하게 구는 이 빌어먹을 실장님 덕에 더욱 쉽지 않다. "오셨어…요." 절대 구직 요망이었던 이유로 변변히 튕겨보지도 못하고 냉큼 제의를 받아들인 멍청했던 나의 행동 덕에 난 나보다 무려! 무려!!! 두살이나 어린놈에게 존대를 하고있다. 물론, 회사 사람들이 보기에는 당연한 모습이다. 그러나, 일개 수영강사인 우경주나 다른 기타 등등의 떨거지들은 놈에게 반말을 하는데 나만 존대를 해야한단 말인가 하는것이 나의 불만이다. 그리고 나와 동갑인 태수에게 녀석은 '형'이라고 잘도 부르며 '그랬어요, 저랬어요'하며 꼬박꼬박 존대까지 한다. 물론 나에게도 근무시간이 아닐때에는 그렇게 예의바른척 가증을 떨지만 근무시간에는 가차없이 반말 확 까버린다. 딴 놈들 한테도 근무시간에 존대 들으란 말이다 !! 이 불공평한 호로 자식아!! "손 좀." "…뭐요?" 카운터 앞에 우뚝 서서는 내게 '손'을 내보이라는 녀석에게 나는 한숨을 한번 내쉬며 스윽 손을 내밀었다. 그래 하늘같으신 실장님이 손 내라는데 내야지. 뭐할라고? 손금이라도 볼려고? 하얀버즘과 붉은 열오른 증상이 한결 나아져 인간다워진 내손을 본 실장녀석은 빤히 손바닥을 잠시 쳐다보더니 왼손으로 내 손 아래를 받치고 오른손을 손 위로 겹친다. [묵직] 녀석의 손이 겹쳐지자 손바닥에 차가운 금속 기운이 돌며 손안이 묵직해졌다. 뭔짓이니? 실장아. "간식이라도 사먹어." 시원하게 미소한번 띄워주고는 휙, 돌아서서 총총히 가버리는 녀석의 등을 보다가 녀석이 완전히 사라졌을때 쯤에 손안을 살폈다. 수십개의 100원 짜리 동전이 나를 보며 '안녕' 하고 웃고있다. 10개씩 한줄로 나열해서 세워보니 다섯줄이다. 5천원. 간식비. 하하… 의외로 진짜 실없는 놈이다. "응? 그게 뭐에요, 선배?" 동전을 보며 피식피식 실없이 웃고 있는 내머리 위로 경주 목소리가 떨어진다. 언제 왔는지 내가 동전세는 곰살맞은 짓을 하는걸 보고 있었나보다. 아니라면 이게 뭐냐고 물을 턱이 없다. "간식비." "에? 그런것도 줘요?" 카운터 지기 3일만에 처음 받은 간식비다. 5천원짜리 한장으로 줬다거나, 천원짜리 다섯장을 손에 쥐어줬으면 기분 나빠서 당장 쫓아가 녀석의 면상에다 돈을 뿌리고 왔을지도 모를일이다. 그런데, 100원짜리로 무려 50개를 맞춰서 떨궈주고간 녀석의 행동이 조금 귀엽기까지 하다. "이실장님이 은형씨 한테 특별히 주고 간거에요." "서준이가요?" 물끄러미 동전 50개 구경하고 있는 나의 어벙함을 틈타, 옆에 앉아있던 민경씨가 경주에게 낼름 대답을 했다. 민경씨의 그 팔푼이 같은 대답에 경주 녀석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다시 되묻는다. 이서준. 직급은 실장. 군대는 비리로 안갔다가 압도적인 지지를 얻고 있지만, 옥의 티는 그것 하나뿐 일처리도 얼굴도 머리도 학벌도 몸매도 심지어는 목소리까지 모든이들의 칭찬의 대상이 된다. 드물게 성격을 칭찬하는 이도 있지만 내게는 용납되지 않는 칭찬이다. "원선배 진짜 서준이가 주고 간거에요?" "어." 카운터로 비집고 들어온 경주는 집요하게 사실을 추궁했고 마지못해 대답을 해줬다. 우경주 녀석이 추궁을 할 정도로 내가 물렁해 지다니 경계 신호다. 좀더 쎄게 나갈 필요가 있겠다. "원은형 선배님을 상대로 존대하라고 할때 무슨 심본가 했더니 그래도 뒷날이 걱정되긴 했나보네, 서준이놈" "뒷 날?" "그렇잖아요. 선배가 오죽 성격이 화끈해야지." 칭찬일테지? 사실 첫날 존대 할것을 강요하는 분위기를 뿜어대는 이서준을 봤을때 난 뜨거운 복수를 다짐했다. 내 화끈하고 뜨거운 복수 언젠가 화려하게 보여줄것이다라고 다짐을 했는데 의외로 근무시간 끝나자 칼같이 존대하는 녀석의 행태에 내심 기분이 좋기도 했고, 한편으론 이놈이 나를 놀리는건가 싶어 다른 한켠에선 더욱 뜨거운 복수를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뭐, 꼭 복수까지 가지 않아도 될것 같다. 내가 녀석을 깔아뭉갰던 전력도 있고 손가락 뭉개진 나를 걱정해 주기도 하고 …그다지 나쁜놈만은 아닌것 같아서 넘어가기로 했다 이거다. "화끈하게 너부터 맞아볼래?" 내가 조용하게 묻자 경주가 부자연스럽게 웃는다. 이 새끼가 이 시간에 왜 나왔겠어. 바로, 내가 이서준에게 존대를 하는걸 보러 나온거 아니겠나. 혼내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나한테 존댓말 하라고 하는 이서준보다 내가 실장님을 상대로 존대를 한다는걸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되는양 옆에서 구경하는 놈들이 더 밉상이다. 거기에 가장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이가 있다면 요놈. 바로 요놈. 우경주라 이거다. "하하하… 선배, 간식비도 받았는데 커피나 한잔 쏘시지요" "지랄마, 새꺄 안 꺼져?" 과장스럽게 큰목소리로 경주가 커피 살것을 제의하자 어디서 듣고 나타났는지 열심히 학생 가르쳐야할 녀석들이 떼로 몰려나와 커피사라고 아우성이다. 이런 개씨발. 시장통 같이 왕왕대는걸 이대로 두면 안될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옆에서 누가 당긴다. 아아, 민경씨. "제것도 부탁드려요." 백화점 옆에 딸린 스포츠 센터는 백화점에서 일괄 관리하는 터에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다 외모지상주의자들이 뽑아놓은 끝내주는 미인들이다. 물론 나와 함께 카운터를 지키는 민경씨도 어디가서 빠지는 외모가 결코 아니였다. 그런 그녀까지 먹성이라면 거지 저리가라인 놈들과 한패로 굴다니 머리가 찌르릉 아프게 울린다. 징크스 ― 돈 역학의 제1법칙 "뜻밖의 수입이 생기면, 반드시 뜻밖의 지출이 그만큼 생긴다." "아." "어머, 은형씨 괜찮아요?" 존경하고 훌륭하기 그지없는 실장님이 떨궈준 사과를 열심히 깎고 있는데 잘 들지 않던 묵은 칼이 내 손을 사정 봐주지않고 깊게 파고 들었다. 씨발, 이놈의 칼 사과는 못자르더니 내 손은 왜 이렇게 깊숙이 찌른거야. 억울함과 이상한 배신감에 무딘 칼을 노려보지만 '난 죄없소' 하며 방긋 웃는 초라한 과도가 보인다. 떨어지는 핏방울을 화장지로 닦아 보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진리 덕분인지 진한 핏멍울이 남아 얼룩덜룩 테이블을 더럽게 보이게 했다. "무슨일이야?" "별일 아닙니다." 정수기로 잽싸게 뛰어가서 화장지에 물 뭍혀 오는데 서준이 무덤덤한 얼굴로 물어본다. 전혀 걱정스럽지 않아 보이는 그 얼굴이, 호들갑을 떨어대는 민경씨와 상반되어 마음 한구석을 울컥 하게 만들었다. 니 살따구 아니란 말이지. 피 난거 안보여? 후배 놈이었으면 조용히 다가가서 뒷통수나 한대 작열해 줄테지만 ―후배는 후배란 이유로 아무 죄없이 맞기도 한다, 이를 선후배의 법칙이라고 명명한다.― 뜬금없이 지나가는 이를 기분 좀 나쁘다고 팰수도 없는 노릇이라 묵묵히 테이블에 남은 핏자국을 닦아 내기만 했다. "다쳤어?" "네, 은형씨가 사과 깍다가 다쳤어요. 칼이 무뎌서 말을 잘 안들었거든요." 아직도 울상인 민경씨가 걱정스레인지 찡찡스레인지 모를 찡얼거림을 하자 서준이 [덥썩] 내 왼손을 잡아 올렸다. 아파, 씹새야. 그리곤 덤덤하던 얼굴이 찌푸려지더니 길게 한숨을 내쉰다. 뭐냐? 별것도 아니라 이거냐? 찢어진 살 사이에서 새빨간 피가 베어나왔다. 생각보다 깊이 베인건가. 진지하게 내 집게손을 보고 있는 서준과 함께 나도 진지하게 피가 베어 나오는 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서준이 빤히 보고 있던 내 손을 [덥썩] 물었다. "야." 더럽잖아, 라고 말하려고 했다. 서준의 입안으로 들어간 내 손끝에 칼에 베어 생긴 아릿한 통증 위로 따뜻하고 말랑하면서 까끌한 표면을 갖고 있는 덩어리가 감싸더니 요령좋게 사르르 혀를 굴린다. 순간 몸이 움찔하며 근육이 발작하듯 튕긴다. 기분이 묘하다. 서준의 뜨거운 입안에서 혀의 속살거림을 당하고 있는건 손가락 하나 뿐인데 마치 온몸이 서준의 혀굴림을 당하는 기분이다. 입안에 고인 타액을 '꿀꺽' 하고 넘기는 느낌까지 혀끝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오자 '멜랑꼬리하다'란 말을 온몸으로 실감할수 있었다. 그렇게 손가락을 한참이나 물고 있던 서준은 제입에서 내손을 꺼내더니 ―어감이 이상한 말이다.― 양복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손가락에 감싼다. 그리곤 민경씨에게 한마디 남기지도 않고 무작정 내손을 꽉 쥔체로 저벅저벅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이서준 실장님." "응?" "뭐하시는 겁니까?" "약국 가야지." 아아, 스포츠 센터에 약국이 딸려있다. 그 옆에는 병원도 있다. 그런데 이정도 경미한 상처에 약국까지 갈 필요는 없다. 내가 서너살 먹은 애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섬세한 여자도 아니다. 좀 심하게 베이긴 했지만 손바닥, 발바닥 껍데기 다 벗겨져도 병원이 싫고, 약냄새가 싫어서, 한약 냄새가 역겨워 그냥 몸을 방치하는 스타일인 내가 겨우 요까짓 상처에 약국에를 간다고? "됐습니다." 내리려고 아무 버튼이나 누르려는 내 오른손을 휙, 서준이 저지한다. 어쭈? 니가 나보다 크다 이거야? "밴드라도 발라야지." 약이라면 물리고 물리고 또 물릴만큼 먹고 발라봤다. 밴드도 지겨울 만큼 발라댔다. 많이 한만큼 적응도 됐겠지만 그만큼 거부감도 크다. 됐다잖아 이새꺄, 왜 갑자기 친절한척 굴고 지랄이야. 정확히 근무시간인 지금 성질도 못내고 반말도 못까대니 의사표현이 잘 안된다. 내가 언제 누굴 상대로 존대를 해본적이 있어야 말이지. 사실 수영선술때 꽤 잘나갔기 때문에 연배가 한참 높은 선배는 코치였고, 나이가 내 근처인 선배는 만날일이 없을 정도로 실력이 괜찮았다. 그래서 늘 처했던 상황이 나보다 어린 실력이 못한 후배들을 대하는게 내 주요 업무였는데, 나이 어린 상관을 모시고 살려니 정말 죽을 맛이다. 말 안통해, 의사 소통 잘 안돼, 말 안듣기까지해 거기다 고집도 나만큼 쎄지. 은근히 사람 열불나게 하는데도 일가견 있는데다 하여간 대하기 어려운 인종이다. "연고하고 밴드주세요." "실장님." 엘리베이터가 [띵] 소리를 내기가 무섭게 나를 덥썩잡고 질질 끈 서준은 약국 앞에 도착하자 생긋 영업용 미소를 지어보이며 약사에게 말했고, 그에 대해 난 짜증을 부렸다. 씨발 약 싫다고 했잖아 이새꺄! 내가 지나치게 과민한 반응을 보이자 재미가 좋은건지 놀려먹기로 마음을 완전히 먹은건지 받아든 연고를 물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서준의 손에 쥐어진 연고통을 뺏을 요량으로 손을 뻗었는데 오히려 그의 손에 내 손이 잡히는 꼴이되어 상황이 정말 엿같이 돼버렸다. 양손을 사내놈에게 잡힌 꼴이라니! "곪으면 어떻해? 그냥 약 발라." "싫다잖아요." 세상에서 가장 싫은 세가지를 꼽으라면 약, 주사, 병원이다. 병원은 한의원을 포함한 것으로 선수생활 동안 줄기차게 침 맞았던것과 끊임없이 물리치료를 했던걸 생각하면 지금 당장 화장실로 달려가야 할 정도로 구역질이 나올정도다. 주사는 그냥 맞으면 그만이지만 그 맞기전에 두려움은 대회에 나가기 직전의 스릴과 맞먹을 정도로 임팩트가 크다. 그리고 약 먹다가 혹여 목구멍에 걸려서 딱달라 붙으면 그것보다 더 싫은게 또 없다. 가루약은 취급도 안한다. 바르는 약의 그 끈끈함만으로도 어느 제약회사 약인지 알정도라면 더이상 말할 필요 없겠지. "곪는다니깐." "곪으면 곪는거지요." 남자둘이 서로 손 부두켜 잡고 나란히 서서 한명은 약 발라야 한다 한명은 됐다라고 떼떼거리며 싸우는 꼴이 얼마나 가당치 않은가는 잘 알지만 정말 약 싫다. 됐다는데 왜 이리 친절을 남용하시는지, 그거 부작용 걱정도 안되냐? "약 안바르니까 가져가세요." 딱잘라 약사에게 말하지만 단단히 약을 손에 쥔 서준 때문에 약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두 남자의 눈치만 보고 있다. 이런 우유부단한 인간을 봤나! 소심증은 약으로도 못고친다는데!! 쯧, 혀를 차며 손을 놔달라는 의미로 팔을 휘젓자 서준은 별 저항없이 쉬이 손을 풀어줬지만 손에 쥐고 있는 연고와 밴드를 사수하는것은 잊지 않았다. 약값을 치루며 내게 웃어보이는 녀석이 이보다 더 미울수가 없다. 씨발, 집착 졸라 강하네 그새끼. 야, 너 그정도 끈질김과 집착이면 의처증 될 확률이 다분하다. 징한 새끼. 징크스 ― 파우스너의 집안일 규칙 "무딘 칼이 손가락은 잘도 벤다." "여어, 안녕?" 늘 생각해 왔던일이다. 어린 상사가 생겨 존대를 하게 되면 나의 적들이 개떼처럼 몰려와서 [캬캬캬] 웃어주는 일은 언젠가 반드시 내눈앞에서 벌어지고야 말것이라는것을. 하지만, 이렇게 빨리 그 일이 닥치게 될거라고 생각지 못했다. 더군다나 너무나 싫어하는 녀석이 대표로 오다니 생각없던 얼굴이 잔뜩 일그러질 만큼 괴롭다. "오랜만이네." 눈앞에 서있는 장신의 현역 최고의 파워 스프린터에게 인사를 받으며 답례로 인사를 했다. 한판 승부가 아닌 예선전을 거쳐 꾸준한 체력을 요구하는 수영에 어처구니 없게도 유도계의 이름을 지닌 '한판'은 나의 같은 종목 친우이자 강태수보다 더 치열한 경쟁상대였다. 뭐, 지금은 이쪽이 운동을 그만둔터라 미운 마음도 사라져야 하겠지만 이녀석 하는짓은 세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엽기인지라 좋아할래야 좋아할수가 없다. "어서오세요, 은형씨 친구분이신가봐요." 사람좋은 민경씨가 예쁘고 해사하게 웃으며 건장한 체구의 한판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건냈다. 그 인사를 받은 한판은 사람좋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답례로 인사를 했고, 한판의 어깨 넘어로 나의 어린 상관님이신 이서준 실장이 뚜벅뚜벅 무덤덤하게 걸어오는게 보였다. 타이밍 한번 죽이는군. 오늘만은 이서준이 안와주길 바랬는데 정말 저놈이랑 무슨 원수라도 진모양이다. "수영하려고?" "아니." 서준이 이리로 오기전에 한판을 탈의실로 밀어넣기 위해 물어봤지만 오히려 한판놈을 이리로 부른것으로 강력하게 의심되는 후배 우모씨등을 포함한 기타등등녀석들이 탈의실에서 튀어나올뿐 탈의실로 들어갈 의사를 가진녀석은 한판을 포함해서 하나도 없는듯 싶었다. 내가 곤란해 하는게 그렇게 재밌나? 생각할수록 화딱지 나는 일이 아닐수 없다. "서준아." 당당히도 우모씨는 이실장에게 말을 팍 까며 이름을 화통하게 부르며 손을 휘적휘적 내저었다. 손님이 와서 가까이 오고 있지 않고 있던 서준은 조금 머뭇거리다 뚜벅뚜벅 발걸음 소리를 내며 가까이 다가왔다. "실장님 오셨어요." 고맙게도 벌떡 일어나 민경씨가 인사를 한다. 카운터 주위를 빼곡히 차지하고 선 장신의 남자들로 볼이 붉어진 민경씨는 아무래도 이중에 그래도 단연 백미는 이서준인것으로 낙찰을 본 모양이다. 덕분에 나는 인사를 하지 않고 그냥 고개만 까딱 해주었다. 내일은 주말이고 고로 일이없다. 앞으로 이틀간은 이 고역스러운 상황을 만나지 않을수 있음을 감사하며 오늘 하루해가 빨리지기를 학수고대했다. "바쁜가봐?" 서준이 내게 한마디 걸어주길 기대하며 초롱초롱 눈을 빛내는 주위의 녀석들의 눈알을 그냥 빼버렸으면 딱 좋겠다. 제일 싫은건 역시 그 마음 딱 읽고 내게 말거는 이서준이 제일 싫다. 그냥 별말없이 가줬으면 좋겠는데 녀석은 바쁘냐고 딱 꼬집어 내게 묻는다. 난 그냥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한번 해보자 이거다. 아침에 일어나서 가볍게 조깅 2시간, 저녁에 체력보강을 위해 웨이트 2시간, 운동 마무리 하면서 근육을 풀어주기 위해 달리기 2시간, 집에 들어가서 잠들기 전까지 꼬박이 맨손체조 2시간으로 하루에 8시간씩 체력관리를 하고있다. 이젠 선수도 아니니깐 그만둬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만두면 다시는 운동에는 손도 안댈까봐 선뜻 그만두지도 못하고있다. 그렇게 하루하루 지나다 보니 어느새 몸에 혼자하는 운동이 익어 습관처럼 하루에 8시간씩 운동을 하고 있다. 남들이 보면 아주 우끼는 짬뽕이 따로 없겠지만 현재 내몸을 관리할수 있는 최후의 방법이다. "이쪽은 현역 수영선수 한판이야. 성이 한씨고 이름이 판인데 이름갖고 놀리는거 별로 안좋아한다." "태수후배지? 태수친구 한판이야." 태수가 음울하고 음침하고 어색한 기운을 마구마구 분출하고 있는 나를 알아채고 조용하게 한판을 이서준에게 인사시킨다. 소개를 받은 한판은 서준에 대해 이미 들은듯 밉살스러운 얼굴로 웃으며 서준에게 아는체를 했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서준은 내게 조금 미안한 얼굴을 하고있다. 괜히 기분이 울컥해서 유리창이라도 하나 깨부셔야 할것 같았다. 나도 태수친구거든? 머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날것 같다. 같은 강태수 친구인데 한놈은 존대듣고 하나는 반말듣는다. 별거 아니지만 그래도 화나는건 나는거다. "안녕하세요." "너 용감하더라. 이야기는 들었는데 용감 할 만하다. 키가 얼마야?" 한판은 너스레를 떨며 서준의 키를 물어본다. 확실히 크긴크다. 더도 덜도 아닌 딱 181cm인 나보다 대가리 하나 더 큰 이서준은 거의 190cm에 육박할 것이다. 먹고 키만 컸나, 아님 수영선수라도 했었나 싶을정도다. 바글바글 모여있는 선생들 틈사이로 똥똥하고 키가 작달막한 아주머니 한분이 용감한 발걸음으로 카운터로 오시는게 보였다. 수영장에 첫날 와서 본 그 분홍 캡, 분홍 수영복의 주인공이신 잠수함 아줌마다. 끄응, 일이 꼬일려니 아주 단단히 꼬이는구만. "어서오세요." "총각." "네." 회원증을 받고 사물함 열쇠를 내미는데 아줌마가 버럭 나를 부른다. 왜요? "총각이 유명한 수영선수라매." "누가요?" 모른척 피식 웃어넘기자 아줌마는 아주 밝혀내고야 말겠다는 얼굴로 눈에 불을 키고 담비실 기세다. 도대체 어느 실없는 놈이 그런 개같은 소문을 내고 다녔단 말이야. 그것도 이 오질없고 수영도 디지게 못하는 아줌마한테… 아줌마, 제가 수영선수 였다는건 그냥 저의 지난 과거일 뿐이걸랑요. 그러니까 쪽팔리고 기분 엿같으니 대강 그런가 보다 하고 가주시죠. "여기있는 선생님들이 다 그렇게 말 하더만." "아니에요." 아줌마가 얼른 가주길 바라며 고개를 돌려버렸지만 이 아줌마 오늘 끈질기게 내게 들러붙는다. "그러지 말고 가끔 특강도 해주고 그러지!" "나중에요." 이럴땐 그냥 적당히 이야기해서 돌려보내는게 좋겠지. 내게 긍정적 답변을 얻어낸 아주머니는 싱글벙글 웃으시며 여자탈의실 쪽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카운터에 바글바글 몰려있는 한판을 포함한 스포츠센터의 선생들을 보며 나직하게 명령했다. "걸리적 거리니까 절로가서 놀아." 민경씨는 내심 서준이 멀어지는게 아쉬운듯 내게 눈치를 주지만 한판에 이서준 거기다 바글대는 후배녀석들은 내게 치명적인 스트레스일 뿐이다. 가라, 가! 멀리가서 놀라고. 징크스 ― 듀드의 2원성 법칙 "두 가지 사건을 예상할 수 있는 경우, 보다 좋지 않은 쪽이 발생한다." 카운터 업무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스포츠 센터의 유리문을 밀고 나가자 멀쩡하던 하늘에서 한방울, 두방울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것 참, 재수없는 놈을 보고 나니깐 마무리도 재수가 없구나. 혀를 쯧쯧차며 인상을 그리고 있는데 뒤에서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이서준이다. "지금가세요?" "어." 근무시간 끝났다. 영업끝과 동시에 내가 반말을 댕강 댕강 쏟아뱉었다. 녀석은 군말없이 꼬박꼬박 존대를 한다. 모르는 사람이 우리를보면 엽기일거라고 생각한다. 한녀석이 반말 할때 다른 한녀석은 반드시 존대를 해야하는 상황이라니 한발작씩만 물러나면 서로 편할수 있을것을 자존심 하나로 버팅기고 사는 인간들이라 그런지 서로 먼저 '말 편히하라' 라고 말하질 않는다. "비오는데 괜찮아요?" "어쩌겠어" 주머니에서 쨍그랑 거리는 동전 몇개를 꺼내서 자판기 커피를 두잔 뽑았다. 하나 뽑아서 먼저 녀석에게 건내고 두번째 커피를 뽑아들고 한모금 삼켰다. 달콤하고 달달한 다방커피를 그대로 모사한 자판기 커피는 내입맛에 잘 맞는편이다. 집에 굴러다니는 동전을 모아 주머니에 넣어뒀다가 생각나면 한잔씩 한잔씩 뽑아먹는다. 심하게 달다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내 입맛엔 딱이다. "오늘 왜 그렇게 기분이 나빴어요?" "…아닌데." 어린아이 어르듯 서준이 다정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낮에 왜그리 말도 안하고 암흑의 기운을 뿜어 댔냐는 말일 터인데 한판이를 내가 싫어하는 이유를 하나하나 꽁알꽁알 말하는건 있어서 안될일이며 있고 싶지 않은일이라 대충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질기기로 치면 스판보다 더 질기고 고무만큼 탄력성 좋은 성격인 이서준에게 나의 어줍잖은 부정은 통하지 않았다. 아, 이시방새 정말 뭘그렇게 따지고 그러냐. "기분 안나쁜데 사람이 말하는데 그렇게 매정하게 굴어요?" 매정은 무슨 매정이야 대답 안하면 매정이냐? "아니라고." 내가 한판이랑 100m 뛰면 매일 졌던 과거가 있어서 난 그새끼 정말 미치고 뒈지게 싫다고 꼭 말해야 겠어? 사실, 백미만 내가 그놈보다 좀, 아주 조금! 못했지 나머지는 다 한판이 보다 나았다. 절대로 한판이가 유복한 집에서 어화둥둥 내자식하며 어른들한테 지나친 사랑을 받고 컸다고 싫어하는건 아니다. 그저 아직까지 조금 남아있는 라이벌 의식 정도로 여기란 말이다! 더이상 있어봤자 쉰소리만 듣겠다 싶어 대충 마무리를 할셈으로 인사를했다. "갈게." "태워다 드릴게요." "아니, 그냥 갈게." 그렇게 말하고 손에 쥐어진 빈 종이컵을 버리고, 곧장 빗속으로 뛰어들어갔다. 사람의 호의를 순수하게 호의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의심하는건 나쁜거지만, 녀석의 호의는 호의가 아니라 마치 나를 놀리는 장난같아서 사양하고 싶다. 어찌보면 착한 녀석인데 그런 녀석이 나를 놀리는걸지도라고 생각하는건 나의 지나친 비약일수도 있는데 의심이 되는 상황이라면 일단은 피하고 싶다. "저…저기." "…네?" 후루루룩, 뜨거운 김서리가 올라오는 컵라면을 맛나게 먹고 있는데 정확히 점심시간에 찾아온 손님 인듯 보이는 사람이 나를 어정쩡하게 부른다. 소심쟁이로군. 어제 빗속을 멋지게 뛰어든것 까지는 좋았는데 정류장에서 한참동안 버스를 기다리느라 집에 도착했을쯤엔 완전히 물에 젖은 생쥐꼴이 되어버렸다. 거기다 뜁박질 좀 했다고 뱃속에서 먹을걸 달라고 얼마나 울어대는지 애밴 임산부도 아닌데 부엌 구석구석을 다 뒤져서 며칠전 사다놓은 깔깔한 빵부스러기를 찾아냈다. 그런데 너무 허겁지겁 먹은게 탈인지 입천장이 홀라당 다 까져버렸다. 그런 입안 상태를 봐주지 않고 뜨거운 국물을 들이키고 있으려니 입안이 얼얼할 지경인데 그런 상황에 봉착한 덕분에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으읏, 혀까지 홀라당 뒤집어 진것 같다. "저…저기." 저기고 여기고 간에 이인간아 말을 해야 알거 아냐? 아씨, 민경씬 밥 먹으러 가서 죽었나? 아님 추수해서 밥 먹고 오는건가? 이런건 사근사근하고 나긋나긋한 민경씨가 훨씬 잘한다. 새로 온 회원관리라던지 등록하려는 사람 유도하는 비지니스는 아무래도 나처럼 멀뚱멀뚱 쳐다보면서 '할말있음 하고 꺼져'라고 위압감 뿌리는 쪽보다 예쁜 여직원인 민경씨가 하는게 훨씬 낫다. 그런데 지금은 그 민경씨가 없다. 거기다 입안은 다 헐어서 얼얼하다. 짜증난다. 이걸 그냥 팍 한대 까버렸음 속이 시원하겠는데 손님이니 그럴수도 없다. "회원등록하시려구요?" "예……네, 저기……." 또 저기 타령이구나. 아무도 없는데 그냥 한대 콱 패버려? "말씀하세요." "한달 회원비는 얼마나 하나요?" 영업용 스마일을 지으며 ―내가 어쩌다가 이런 스마일을!― 앞에 선 비리비리해 보이는 남자에게 다정하게 굴자 그는 조금 안심이 됐는지 옅은 갈색 눈을 동그랗게 내리뜨고 물어온다. "수영 처음하시는 건가요?" "네." 어린아이처럼 하얀피부에 눈동자 색깔 만큼 옅은 갈색머리는 분명 성인일게 틀림없는 그를 꽤나 어리게 보이도록 했다. 이 점심시간에 학교 띵쳐먹고 오는 또라이는 있을수 없다. 대부분 대학생들이 남의 밥먹을 시간에 쳐들어 와서 회원등록을 하고간다. 난 회원등록 서류를 꺼내며 수강료에 대해서 설명했다. "처음하실때 일단 한 달 정도 해보시고 그 후에 몸에 맞으시면 세달이나 여섯달정도 달아서 하시는게 좋아요." "예전에 잠깐 한적이 있긴 있었는데요……." "얼마나요?" "초등학생때요. 그때 너무 못해서 이번엔 좀 잘해보려고……요." [요]자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정도로 조그맣게 말하는 그를보면 난 씨익 웃어버렸다. 아줌마들만 못하는게 아니었군. 그러니까 예컨데 물에만 가면 허우적허우적대는 바보도 있는거였어. 흐음. 귀여울지도. "물때문에 피부가 상하거나 귀에 중이염같은게 생기는건 아니었죠?" "네." "어깨에 무리가 간다거나 하는것도 아니라면 처음부터 세달쯤 신청해서 꾸준히 해보세요." "에에……그……그럴게요" 선선하게 웃으며 그에게 권유를 하자 나의 권유가 강압으로 먹힌것인지 그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어찌보니 중학생 꼬마처럼 보이기 까지 한다. 품에 안으면 싹 들어올 정도로 가느다란 몸을 갖고 있는 그에게 난 회원등록서를 내밀고 펜을 쥐어줬다. 등록하고 컴퓨터에 입력하고 카드끊고 그가 인사를하고 갔다. 인사도 수직으로 하고 가는 그를 보며 키득거리고 있는데 누군가 긴그림자를 드리우며 내앞에 뚱하게 서있는게 보였다. 이시간에 올놈 하나밖에 없다. 이서준이다. "뭐가 그렇게 좋아?" "별로 안좋은데요." 말은 안좋다라고 하며 생글생글 내가 웃어뵈자 서준의 표정이 조금 찌푸려졌다. 다른때 같으면 그냥 먹을거나 떨궈주고 갈 녀석이 카운터 안으로 들어오더니 옆자리에 털썩 내려앉는다. 민경씨가 좋아하겠다. 자기자리에 이서준 앉았다고. "아까 걔 누구야?" "새로 등록한 회원이요." "아는사이야?" "아니요." 대답이야 잘 하고 있지만 이녀석 보면 참 이상하다. 진지하고 진중한 얼굴로 곰살맞은 질문이나 해대는 꼴이라니. 그런건 왜 물어? "그자식 좋아해?" "네?" "계속 웃고 있었잖아." "손님이잖아요." 내가 딱잘라 대답하자 서준의 표정이 더욱 진지해진다. 심각한 표정과는 전혀 다른 질문을 받는것도 이젠 익숙하다. 아직 어리구나. 라면서 그냥 넘어가는거다. "난 손님이 아니라서 보면 인상 쓰고?" "글쎄요." 난감한 질문을 하는 서준을 보며 고개를 흔들며 다뿔어버린 컵라면을 다시 휘적거렸다. 묘한 기분이다. 이상한건 왜 묻고 지랄이야. 기분 심심해지게. 아, 이 라면 정말 완전히 다뿔었잖아. 짜증나게. 묘하게 위압적인 표정을 짓는 서준을 따라 나역시 심각한 얼굴을 하며 어울리지 않게 컵라면을 비우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녀석은 무슨생각을 하는거지? 징크스 ― 위대한 인물의 규칙 "당신이 대단히 존경하는 인물은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마 그때에도 점심식사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비리비리해보였던 갈색머리 남자의 이름은 진규였다. 그는 간혹 내가 컵라면을 들이키고 있을때 김밥 한줄을 주고갔다. 그런데 진규가 다녀가면 서준의 인상이 나빠진다. 뭔가 고민하는 그 얼굴이 무얼그리 생각하는지는 알수 없지만 여하튼 굉장히 심각한 표정이다. 오늘은 일요일이다. 일이 없어서 스포츠 센터에 갈일은 없지만 난 토요일 하루 죽어라 잠만 자던것을 만회하기 위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스포츠 센터로 가는 길로 뚜벅뚜벅 걷기 시작했다. "에? 선배? 오늘 웬일로 나오셨어요?" "어른 한 장." 오천원권 한장을 내밀며 후배녀석의 기겁하는 소리를 못들은체 했다. 제말이 씹힌게 섭섭한지 무어라무어라 궁얼 대는 녀석의 말은 싹 무시해버리고 열쇠를 받아들고 남자탈의실로 들어갔다. 여기서 일한지 이제 근 3주가 되어가고 있는데 첫날 온 이후로 단한번도 풀장근처로 가질 않았다. 정처없이 걷는다라고 생각했는데 스포츠 센터로 올바르게 나를 이끌어준 다리는 이미 한참을 걸어온 덕에 힘이 다 빠졌지만 줄지어 있는 락커룸 중에서 받아든 열쇠 번호에 맞는 것을 찾아 열었다. 훌렁 훌렁 옷을 벗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끈덕지게 노려보는게 느껴졌다. "웬일이에요?" 태수와 나란히 수영복 차림으로 서있던 서준이 내게 물어왔다. 저쪽도 벗고있는데다 이미 한번 본 몸이라 당황스러울 일이 없어야 할텐데도 내가 브리프 한장 걸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못내 쑥쓰러워 얼굴이 순간적으로 얼어버렸다. 남들 앞에서 옷갈아 입은게 한두번이 아니건만 왜 당황하냐. 잠시 어버버 거리고 있는데 태수는 제 할 일이 끝났는지 '놀다가라' 라는 말을 남기고 수영복 위에 옷을 챙겨입고 나가버렸다. "그냥." 진규가 준 김밥을 받아 먹어서 그런가 그쪽의 소심병이 이리로 옮겨오기라도 했나보다. 나를 빤히 쳐다보는 [그것도 아래위로 훑는] 서준의 시선을 피해 옷을 옷장에 넣고 가방에서 수영복을 꺼내 들었다. 여전히 노골적으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서준이 무척 부담스러워 되도록 빨리 샤워장으로 가려고 하는데 내 어깨를 한손으로 잡더니 벽으로 [턱] 몰아붙인다. 뭐냐? "몸이 얼굴이랑 안어울려요." 갑작스럽게 벽쪽으로 나를 몰아붙이길래 깜짝 놀랐는데 기껏 하는 소리가 저거다. 나참, 몸이 얼굴이랑 안어울려? 야, 니 행동이랑 니 몸은 어울리는줄 아니? "뭐가." "근육뿐이잖아요." 부피가 큰 근육은 수영장 훈련이 없어진 후부터 쭈욱 가늘어지고 있었지만, 꾸준한 지상훈련으로 몸이 마른근육에 둘러싸여 지고 있었다. 이몸 만들려고 내가 하루에 몇시간이나 투자하는데 뭐가 어쩌고 저째? 이자식을 상대로 당황한 내가 바보지. 제길. "너 나 운동했던거 허투로 봐?" "그래도 얼굴이랑 안어울리니까." 수경과 수모를 손에 들고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쓸어올리며 서준이 인상을 찡그렸다. 내 얼굴이 몸이랑 뭐가 안어울려! 왜 보자마자 시비야! 너 나랑 한판하자 이거냐? "뭐가 안어울리는데?" 실한올 걸치고 있지 않은 상태임에도 난 당당하게 녀석에게 따지듯 물었다. 사람이 별로 없는 탈의실 내부에 내소리가 울렸다. "얼굴은 근육없이 생겼을거 처럼보여서요." "지랄하네." 쌈박하게 욕해주고 샤워장으로 들어가는데 뚜벅뚜벅 녀서이 뒤를 따른다. "너 왜들어와?" "구경하려고요. 몸 좋네요." 여자한테 그런소리하면 너 쪼인트 까이는건 아냐? 민경씨는 절대로 모를거다. 저자식이 뇌는 아직 어린이라는것을. "나가." "여기 전세냈어요? 본다고 닳는것도 아니잖아요." 그래, 본다고 닳는것도 아니다. 같은 남자고 본다고 범죄가 될 일도 아니다. 그런데 저 찌를듯한 눈빛이 심히 부담스럽다. 꺼져!! 목구멍까지 화딱찌가 화르륵 올라왔지만 일단은 잘 참았다. 샤워를 대충하고 수영복을 껴입고 풀장으로 가기위해 샤워장을 나왔는데 깔끔한 정장이 아닌 편안한 캐주얼차림의 서준이 보였다. "그차림으로 따라 들어오려고?" 수영복 차림으로 있을줄 알았던 녀석이 겉옷을 입은체로 풀장쪽으로 가는 나를 따라오는게 보였다. 이거 오늘 의외로 물 먹일 절호의 기회인지도 모른다. 흐음. "네." "맘대로해." 한발한발 풀장쪽으로 갈수록 심장이 쿵.쿵.쿵. 커다랗게 울린다. 얼마만에 물인지. "은형선배?" "우와 진짜 은형선배네요!!" 안전요원을 하고있던 후배 두녀석이 카운터에 앉아있던 녀석 못지않게 호들갑을 떨었지만 그런것 따윈 깔끔하게 무시해줬다. 적당히 몸을 풀고 입수하려고 하다 뒤로 쓰윽 돌아보니 어디 잡지에서나 나올법한 차림새로 유유자적하게 서있는 서준이 보였다. 몸에 물을 뿌리고 두어번 더 가볍게 체조를 하다가 느릿느릿 이서준 앞으로 다가갔다. "수영안해요?" "해야지." "그런데… 어엇." "혼자하면 재미없잖아." 큭큭큭, 난 씨익 웃으며 서준의 손을 잡고 있는 힘껏 풀장쪽으로 당겼다. 마치 논개가 일본장수를 끌어안고 물속에 입수할때 처럼 이서준의 손을 꽉 붙들고 물속으로 풍덩! 리얼한 사운드 효과까지 일으키며 [꼬륵꼬륵] 물거품을 일으키며 입수했다. "풉, 뭐,뭐,뭐, 뭐에요?" "시원한거 같네." 옷을 입은체로 락스물에 빠진 서준은 무척 원통한지 나를 찐하게 노려본다. 마지막 라인에 옷을 다입은 총각 하나가 빠진이유로 사람들은 슬금슬금 우리가 빠진 레인에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흠흠. 기분이 묘하군. 한편으론 이 레인은 내꺼다라고 느껴지면서도 누군가 나를 꺼린다는 것이 조금 아쉽기도 하다. "젠장, 옷! …어쩔거에요?" "수영복 입고 나가던지." 온천 유랑온 어른신들처럼 수영장 풀안에서 흐느적 거리는 나를 보며 서준이 인상을 찡그린다 "수영 안해요?" "놀러온거야." 대표팀 그만둘때 부터 더이상 열심히 수영을 하는일은 없을거라고 생각했다. 몸 만들기는 아마도 운동선수도 아닌 이서준 보다는 나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한것도 없지않아 있을것이다. '하하하' 오랜만에 소리내서 웃었다. 락스물에 빠진 이서준이 왜 귀여운지 모르겠다. 사실 귀엽기로 치면 진규쪽이 훨씬 귀엽다. 어디 그뿐이랴 길에 널리고 깔린게 예쁜 여자들인데 그런거 다 제쳐두고 저렇게 덩치만 산만한 ―물론 얼굴은 부담스럽도록 잘생겼다― 녀석이 이뻐보이다니 가히 엽기도 이런 엽기가 없다. 어쩌지……. "놀러온거면 혼자 놀지 왜 사람을 물에 빠트려요?" "너랑 놀고 싶어서." 내대답에 서준의 얼굴이 급속하게 굳어간다. 뻣뻣하게 굳은 그 얼굴이 뭔가 말을 해줄듯 해주지 않을듯 안타까움을 자극한다. 뭔가 할말이 있으면 해보라구, 이서준군. 딱딱하게 굳은 서준의 얼굴을 마주한 내 얼굴이 방긋하고 웃었다. 정말 '방긋' 하고 소리가 날 정도로 웃어버렸다. "그럼 수영복 입고 오라고 하던지요." "거참 되게 딱딱거리네." 내가 허허허 웃어버리는게 속상한건지 이서준의 표정이 심하게 안좋아보인다. 아직도 나는 수영을 많이 좋아한다. 하고 싶고 즐기고 싶고 노력할 마음도 있다. 그런데 일상의 즐거움이란것이, 그 평범함 속에 묻어오는 재미난 일들이 콜라 알갱이 처럼 톡톡쏘는 심장을 간질거리게 하는것들을 계속 느끼고 싶다. 되도록 내앞에서 자존심 내세우는 이 남자와 함께 느끼고 싶다. 왜 몰랐을까? 수영장에 끌어당기고서야 알았다. 쿵쿵 울려대던 심장이 이녀석과 함께 풀장으로 가고 있다는 것 때문이였다는것을. 락스물에 빠져 매콤한 코를 손등으로 누르며 인상을 찡그리는 이서준을 보고서야 알았다. 의외로 내가 이서준이란 인간을 좋게 생각한다는것을. 이야기할때 후들거리는 심장이 이녀석 때문이란것을 확인하고서야 알았다. 내가 이서준이란 인간을 사랑하고 있다는것을. 특별한 감정으로 특별한 눈길로 특별한 마음으로 특별한 상대로 바라보고 있다는것을 이제야 알았다. 눈 깜박할 정도로 짧은 순간에 내게 툴툴대는 락스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어버린 모습 조차도 멋져보이는 이서준을 보고서야 그제서야 알았다. 나 너 좋아하는구나. 징크스 ― 얼간이의 법칙 "찾는 물건은 항상 마지막에 찾아보는 장소에서 발견된다." fin